클로드 모네 작품 관전 포인트 약력 사랑 인상주의 화가 생애 메세지 알아보기
빛의 사냥꾼 그리고 인상파 창시자, 지도자로 불리는 클로드 모네의 작품을 관전하기 전 인상주의 화풍이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는지 또 그는 어떻게 해서 위대하고 대단한 화가로 남게 되었는지 그의 인생을 만나보도록 하겠습니다.
1. 약력
- 본명: 오스카 클로드 모네 (Oscar-Claude Monet)
- 출생 - 사망: 1840년 - 1926년 (향년 86세)
- 국적: 프랑스
- 화풍: 인상파
- 종교: 가톨릭 -> 무교(무신론)
프랑스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프랑스의 항구 도시 르아브르에서 성장하였습니다. 어릴 적부터 그림에 재능을 보였던 그는 누구에게도 배운 적은 없었지만 유명한 화가이기 전 캐리커쳐를 매우 잘 그렸습니다. 한눈에 어떤 사람이나 사물의 특징을 파악해 재미있게 캐리커쳐를 그렸던 그를 '외젠 부댕'이라는 화가가 재능을 알아보곤 풍경화의 매력을 가르치게 됩니다.
클로드 모네는 고전 시대의 인물을 그대로 그려내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그는 야외로 나가 자연이라는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리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빛의 사냥꾼이라 불리는 클로드 모네는 인물의 특징을 잘 잡아내는 재능을 그대로 살려 자연광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풍경을 그렸습니다.
잠깐 웃는 이야기로 클로드 모네는 풍경화를 그리는데 따르는 불편함도 많았는데요. 차디찬 겨울에는 강추위 속에서 오들오들 떨며 붓을 잡았고 바람이 불면 채색하던 화지가 날아가 주우러 가는 등 다양한 상황이 많았을 것 같습니다. 명작을 그리는 그에게 재밌는 과정이 숨어 있었네요.
풍경화를 그릴 때 밑그림 작업을 하지 않고 바로 채색을 했기 때문에 당대의 고전적인 양식과 규격에 맞춘 그림과 이질감이 있었습니다. 보수적인 사람들에게는 어린아이가 그린 그림이라고 악평을 받았습니다. 당시 사람들도 굳어진 관념에 따라 작품을 보는 시선에 틀에 갇혀 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네요. 변화하는 시대에 적응하는 것도 인간의 숙명인 듯합니다.
2. 대표작 <인상, 해돋이>
'인상주의자'라는 이름을 얻게 된 작품으로 모네(34세)를 중심으로 전시회를 열었던 당시 화가들은 이 이름을 얻게 된 것에 기뻐했습니다. 자신들만의 색을 보여줄 첫 전시회였지만 비평가에게 조롱의 의미로 붙어진 이름이었습니다. 어린아이의 그림 같다. 또는 스케치에 지나지 않다는 비평을 받았습니다.
클로드 모네는 카달로그에 실릴 작품 이름을 '르아브르의 풍경' 그리고 '해돋이'라고 했다가 너무 식상해서 앞에 인상을 붙여 '인상, 해돋이'라고 이름 지었다고 합니다. 당시 기성 예술가들은 새로운 화법인 클로드 모네의 작품을 인정하지 않았는데요. 어떤 영향을 받아 그의 그림은 성장했을까요?
모네는 1867년 27세에 그의 그림 모델이자 애인이었던 카미유가 그의 첫아들 '장'을 낳자 1970년 결혼했습니다. 하지만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일어나 런던으로 이주했고 런던에서 영국 화가의 작품을 접하고 색채를 표현하는 기법을 영향받았습니다.
이후 1871년에 세 사람은 프랑스 파리 근교로 돌아와 집을 마련하였고 당시 생활고에 시달리던 그는 무명 예술가 협회를 조직하고 1974년 34세에 첫 번째 그룹전을 열었는데 이때 '인상, 해돋이'를 출품했습니다.
노르망디 해협에 위치한 항구도시 르아브르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클로드 모네는 훗날 작품을 창작하는데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해협은 급격하게 날씨 변화가 많고 이에 따라 자연의 빛을 표현하는데 많은 노력이 있었습니다. 빛이 보여주는 세상에 매료되어 그 변화를 포착하고 그려내는 과정에서 붓의 터치감은 거칠었고 짧게 끊어지는 속도감도 느껴집니다.
원근법, 채색, 구도 등 전통적인 회화 기법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빛의 변화에 따라 색을 표현한 그의 그림은 예술계에 균열을 일으키고 대중들에게 새로운 눈을 열어줬습니다.
3. 클로드 모네의 사랑 그리고 작품
1965년 첫눈에 7살 연하인 카미유(18세)와 사랑에 빠져 버린 그는 자연스럽게 연인으로 발전하게 되어 동거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모델이라는 직업군은 시선이 그리 좋지 못했습니다. 포즈만 취하는 게 아니라 그림 작업이 끝나면 화가와 동침하는 경우가 많아 사회적으로 가벼운 여인으로 취급받았죠.
중산층 집안의 자식으로 태어난 클로드 모네는 작업비를 지원받으며 작품 활동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의 관계를 반대하던 모네의 아버지는 경제적 지원을 끊겠다며 두 사람의 사이를 갈라놓으려 했지만 클로드 모네는 사랑을 포기하지 못합니다. 이후로 그도 여느 다른 화가처럼 가난하고 힘든 시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1867년 그와 애인이었던 카미유 사이에서 첫아들 '장'을 낳았습니다. 1970년 결혼식을 올린 모네는 이제 아이와 아내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 되었습니다. 모네는 몽마르트 광장으로 찾아가 그림을 내다 팔았습니다. 아내 카미유는 세탁부로 일을 하며 세 사람은 어렵게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하지만 팔리지 않는 작품과 갈수록 악화되는 생활고에 낙담한 모네는 센강에 뛰어들어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는 무모한 짓을 했습니다. 이후 모네는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을 피해 런던으로 이주합니다. 하지만 차가운 파리의 단칸방에 남은 카미유는 혼자 아들을 돌보게 됩니다. 이때 급격히 건강이 악화되었다고 합니다.
1870년 신혼여행 당시 그린 작품으로 그림 속에 양산을 들고 앉아 있는 여인이 바로 아내 카미유입니다. 얼굴에 가려져 있는 천은 햇빛에 노출된 얼굴을 가리는 용도로 당시 패션을 엿볼 수 있습니다. 뒤에 있는 여인과 아이의 역동적인 움직임과 부서지는 파도를 묘사한 부분이 관전 포인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1871년 다시 프랑스로 돌아와 파리 근교에 약 10km 정도 떨어진 아르장퇴유에 집을 마련했는데요 이곳에서 1878년까지 머물게 됩니다. 아래 그림을 보면 개화 시기에 양귀비가 들판에 주욱 펼쳐져 있는 모습이 너무 아름답습니다.
모네는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 장과 함께한 소풍에서 그의 유명한 작품을 남기게 되었는데요. 푸른 하늘에 빨간 양귀비와 노란 꽃이 피어있습니다. 양산을 든 엄마와 그 옆에 양귀비꽃을 한 아름 품에 안고 있는 아이의 모습이 사랑스럽습니다. 위 그림은 <인상, 해돋이>와 같이 첫 전시회에 출품한 작품이라고 합니다. 이 시기에 훗날 인상주의의 모태가 되는 무명 예술가 협회를 모네는 조직합니다.
생활은 많이 힘들었지만 모네에게는 그 순간만은 행복했습니다. 하지만 그 행복도 잠시 영원히 함께할 것만 같았던 카미유는 32살인 1879년 둘째 아이를 출산한 뒤 알 수 없는 병으로 숨을 거두게 됩니다. 미술사에서는 골반암 또는 자궁암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죽음을 앞에 둔 카미유 모네의 모습입니다. 경제적으로 너무 어려웠고 정확한 병명도 알 수 없이 그녀를 떠나보낸 모네는 그녀의 초라한 죽음이 자신 때문이라는 죄책감에 시달립니다. 아내가 숨을 거두고 난 뒤 그녀가 좋아했던 목걸이를 걸어주었다고 하네요.
아이러니하게 그는 그녀의 죽음 앞에 붓을 들었습니다. 그녀의 안색이 변해가는 것을 포착하고는 장례식장에서 화폭에 담아내기 시작했는데요. 이를 말리던 절친한 화가 르누아르는 역정을 내며 말렸다고 합니다.
클로드 모네가 울면서 말하길 "지금까지 해줄 수 있는 것은 그녀를 내 그림 속에 담아두는 것뿐이었기에 나는 그녀를 보내면 두 번 다시 그려 줄 수 없다고..'말이죠.
마지막으로 그녀를 그려주고 싶다던 모네의 이 그림은 그가 죽고 난 뒤에 세상에 알려졌다고 합니다. 죽어가는 아내의 낯빛에서도 평소의 습관이 반사작용처럼 색을 구별하고 그녀를 화폭에 담아내는 클로드 모네의 감정은 어떠했을까요?
감히 상상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4. 클로드 모네의 메세지
인상주의 화가를 대표하는 인물로 꼽히는 클로드 모네가 작품을 대하는 태도와 빛과 색을 '직관'하는 눈을 가진 그가 한평생 바라본 세상은 어땠을까요?
자연에서 주는 선물은 빛과 색채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가 화폭에 담아내는 그림에는 풍경뿐만 아니라 그 시대의 문화와 주위 인연과 함께했던 추억에서 비롯된 인생이 그려져 있습니다.
행복, 비극, 시련, 생활고, 전쟁, 아내, 아버지, 친구, 동료 등 많은 것이 담겨 있습니다.
클로드 모네가 남긴 희대의 작품은 우리에게 어떤 영감을 주며 개인의 비극에서 벗어나 크게는 우리가 앞으로 풀어나가야 하는 비극은 무엇일까요.
모네가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고찰해 보는 시간이었습니다.